[학부모/교사] 자유게시판 (자녀와 ID 공유 금지)

2008년 가을, 시간이 너무 빨리가다가 멈춰 버린듯 하더니 어느날 코 끝에선 한국의 가을 냄새가 나더군요. 이곳은 우리나라랑 거의 날씨가 비슷한데 겨울은 0도 전후로 크게 춥지 않고 봄의 토네이도만 잘 피하면 청명한 가을이 길어 가난한 유학생에겐 최적의 유학지 였던것  같습니다.

영어를 어떻게 가르칠까만 고민하고 질주했던 날들에 정신차리고보니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이기는 했지만 미국인이라고는 월마트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전부였죠. 거리엔 걸어다니는 사람 하나 없고 이웃사람은 뒤통수만 두어번 봤을 뿐 월 렌트비 낼 때 웃어주는 직원 여자 말고는 집 주변에선 뜨거운 한 여름엔 사람 구경조차 힘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영어를 늘려야 하는데 초조해지기까지 하더군요. 하지만 말은 걸어도 안부나 출신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뿐 10분이 넘어가면 서로 힘들어 지기 시작 했습니다.

남편은 대학원에 학기가 개강하면서 바로  학교 스타벅스 매장에 일자리를 구하고 writing교정 강사를 하는 등 새벽 3시까지 공부며 일을 하느라 나의 힘듦엔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파란 눈의 그들 틈에서 던져진 영어의 바다에 장비 하나 없이 헤엄치는 꼴이었죠. 엄마로써 너무나 걱정이 된 나머지 어느 날은 아들보고 끝나면 도서관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우린 한국에서도 학교 도서관에서 자주 만났었거든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겁니다. 당연히 부모가 아들을 기다리는데 학교 도서관에 있는게 문제가 될 줄 몰랐던 거죠.

들어가는 입구에서 빨간 눈의 아가씨가(아마도 사서 였을 겁니다) 저지 하더군요. 뭐라고 했을텐데 너무 빨라 못 알아들었지만 나름대로 해석 하기는 수업이 끝나서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정도로 이해 했던 겁니다. 날은 화창하고 아이들도 한 둘 나오길래 도서관 바깥의 벤취에 앉아 있었죠. 근데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경찰이 눈에 들어오는거였어요. 설마 나 일려니 콧노래를 흥얼 거리며 애써 딴데를 보고 있는데 내 앞에 떡 와서는 신분증을 보자며 부드럽게 말은 하는데 엄청 당황스럽더군요. (경찰은 참 언제나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쩌구 저쩌구 역시나 앞뒤 몇 단어만 알아듣게 떠들더니 웃으면서 탱큐 하길래 나도 모르게 탱큐 했습니다. 그 때 까지도 아들이 옆에 와서 있는 줄도 몰르고... 아들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다짜고짜 이젠 학교를 오지 말라고 하는거에요. 그 경찰관이 나에게 주의사항에 대해 얘기하고 의심 스럽다는 말을 한건데 내가 땡큐라고 했다고... 참...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난 웃음이 났는데 아들은..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습니다. 집으로 오는 그 길이 참 길게 느껴졌었습니다.

사연인 즉슨 아까 그 빨간눈의 여자가 저를 수상한 사람으로 신고 한 겁니다! 도서관에 아들이 있는지 주변에서 한참을 기웃 거리긴 했었죠. 그러다 용기를 내서 들어 간건데 이제 생각해 보니 아마도 office가서 visiter를 받아 오라고 한 것을 빨간 눈만 쳐다 보느라고 정신이 멍했나 봅니다. 그리고는 다시 주변 벤취에 앉아 나오는 사춘기 아이들을 열심히 쳐다 보았으니 유괴범 정도로 보였을까요?

저는 그 날부터 아이들이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미국에서 살아남을려면 이렇게 집에서 지나가는 구름만 쳐다보면 안되겠다고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근처의 커뮤니티 칼리지를 무작정 갔습니다. 내가 인터 내셔널이고 학교를 다니고 싶은데 수업 받을 수 있느지를 상담하니 F-1 비자가 아니어서 정규 수업은 안되고 non credit으로는 가능 하다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500불을 내고 이미 시작된 정규 클래스를 들어 갈 수는 있었지만 수업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수업을 따라 가기는 하겠더군요. 읽고 쓰는 것은 우리가 기본으로 하던 것들이니 말만 시키지 않으면 다들 내 수준을 몰랐을 겁니다. 미국와서 3개월동안 무수히 주저 앉게 하더니 더이상 내려갈 바닥도 없는 듯 했습니다. 그나마 수업은 그런 중에서 나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조금씩 일으켜 주는 듯 하더군요.

한편으론 어떻게든 회화를 늘리기위해 주말마다 교회 봉사하는 부부들을 한 가정씩 초대 하기 시작 했습니다. 대부분 인터내셔널들을 많이 상대해서인지 한국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하니 좋아하더군요. 아마 그 기간에 먹어치운 불고기는 소 한 마리 값은 들었을겁니다. 유학생 살림이 뻔하지만 우린 다행히 한국에서 쓰레기통까지 부쳐온 덕에 한 두가정을 불러 파티할 정도의 그릇이며 구색을 갗추고 있었던 것이 지나고 생각하니 참 다행 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을 주말마다 음식을 해 대었나 봅니다. 그들과 친해질수록 우리도 미국문화를 접할기회가 많아졌고 더이상 해가 몇시에 뜨고지는지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겨울 방학을 맞이 하여 우리 딸 친구애들이 세명 미국학교 다녀보겠다고 단기 어학연수를 오게 되었습니다. 12월초라 컬리지에선 기말 시험이 시작되던 차라 집안 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군요. 숙제를 하나 miss햇습니다... 평소 무척 좋아하던 교수라 구구절절 사연을 보내니 너는 정규 학생이 아니니 학점에 신경쓰지 말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는 겁니다. 순간 뒤통수를 한대 맞은 듯 했습니다. 다음엔 살짝 의욕을 잃고 페이퍼 하나를 그냥 안냈습니다. 이번엔 그 친절한 메일 한 번이 없더군요. 마음에 허무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수업들을 내 맘대로 종치고는 난 다시 홈스테이에 열중 했습니다. 3개월 동안 뭔가 얻어서 가야 할 아이들이 일단 눈 앞에 있었으니까요. 그 애들과 다시 한국문법이며 에세이를 신나게 쓰고 강의하고 ..다시 지나간 나의 날들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겨울이 그렇게 가고 아이들이 돌아 갔습니다. 커피를 한 잔 가지고 문득 창 밖을 보니 익숙한  정적이 흘렀습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2009년 봄이 소리도 없이 시작되고 있었건만 난 다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토플 책을 싸들고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을 미친듯이 공부했습니다. 토플 접수를 하고...시험 보는 내내 아무 생각도 안들더군요. 그냥 다시는 이따위 시험 안보고 싶다며 이를 갈았을 뿐 돈이 아까워서 끝까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과는.. ocu 대학원에 어플라이하고도 남을 점수가 눈 앞에 있었습니다! 아.... 어머니...믿을 수가 없었습니다.떨리는 마음으로 대학원 등록을 마치고 I -20를 들고 F-1비자 신청 서류를 꾸며 대사관에 보낼 때까지 줄곧 꿈속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대학원을 다닐 수 있다니... 20년전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뒷바라지로 대학을 다녀야 할 때 접었던 꿈 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도 깊이가 있는 무엇이 늘 나를 목마르게 했었습니다. 아이들 영어를 위해 미국에 온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만들기 위해 온 듯 ...  그날부터  난 착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오기 전엔 미국에 오면 그냥 영어가 될 줄 알았습니다. 학원에서 강의 할 때 미국에서 살다 왔다는 아이들이 있으면 내 발음은 더욱 작아지는 듯 했구요. 처음 몇 달은 미국인들만 보면 일단 반가웠죠. 아! 영어로 말할 기회다 하며 땀 흘려가며 혀를 굴려습니다. 알아 듣든지 말든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웬지 점점 더 자신이 없어 지는건 왜 였을까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엔 피하고 있더군요...적극적으로 달려 들어도 시원찮았는데 말입니다.

반면 아이들은 사춘기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6개월이 지나니 무서운 속도로(여기서 기준은 말한마디 못하는 우리 아이들이 말을 한다 정도 입니다만)늘더군요. 적어도 3개월은 혼자 앉아 점심을 먹었다고 했지만 분명 1년이 다 되어가니 알아듣고 원하는 표현은 할수 있더라는 겁니다. 적어도 나 보다는요.

지금의 결론은 우리나라의 학습법에 말할 수 있는 환경이면 우리 나라에서도 되겠구나 싶었고, 이 곳이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쉽게도 누구나 쉽게 말하는 책읽기였습니다. 한국에 있었다면 내신이다, 수행이다 하는통에 미국소설은 커녕 한국 필독서라도 스스로 집어들 수 있었을까요? 아이들이 한번에 20권씩 빌려주는 도서관에서 책에 파묻힐 시간이 있었다는 것, 그것이 한국에선 할 수 없는 영어 환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