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교사] 자유게시판 (자녀와 ID 공유 금지)

오늘 작은 아이를 데리고 안경점에 다녀왔어요. 스홀 가족께서 저렴한 곳을 알려주셔서 온가족이 출동했지요.

그런데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더군요. 한참 뛰어놀 8살 꼬맹이에게 족쇄를 채우는 기분이 들어서요.

그래서 하루 종일 밍기적거리다 해가 저물어서야 집을 나섰어요. 안경 안 쓴 모습을 눈에 더 담아두고 싶어 하루라도 미루고 싶었는데 아이가 하는 말에 눈물이 터져버렸거든요.

아이한테 팩으로 된 야채주스를 줬는데 그동안 안 먹던 야채주스를 냉큼 받아다 쪽쪽 빨아먹더라고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빠, 여기에는 당근이 들어있어서 제가 꼭 먹어야 되요. 앞으로 야채주스 많이 주세요.

아... 그 말에 못난 아빠가 또 눈물바다가 됐네요. 아이한테 들키지 않게 화장실로 뛰어가 수돗물 틀고 한참 울었거든요. 저한테는 괜찮다며 잘 보인다고 해놓고 사실은 눈이 좋아지고 싶었나 봐요. 그거 먹는다고 좋아지는게 아닌데 어린 마음에 진짜 믿어버린거죠. 하.... 애한테 괜한 거짓말을 한건지... T_T

이제까지 자기 눈이 나쁘다는 사실, 다른 사람에게는 세상이 또렷히 보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8살 꼬맹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혹시 그렇게 낳아준 부모가 원망스럽지는 않았을까요? 차라리 원망이라도 하며 울고불고 떼를 쓰면 미안하다 사과하며 함께 울어줄텐데 해맑은 표정으로 괜찮다고만 하니 더 미치겠어요.

어쨋든 아이 손을 잡고 함께 안경점에 갔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네요. 첫 안경이니 좋은 걸로 사주자고 하면서도 집사람이나 저나 제일 싼 쪽에서 고르고 있더라고요. 어린이 전용 안경테도 있던데 가격표를 보니 손이 쉽게 안 가서요. 그래서 만 몇 천원짜리 테를 골랐더니 아이가 가격표를 보고 일십백천만하면서 세더니 우와 엄청 비싸다 라고 하네요. 그 소리에 아이한테 미안한 마음보다 누가 들을까 창피한 마음이 앞서더군요. 안경 하나 못 사줄 만큼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도대체 뭐하는건지 정말 부모자격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안경점 직원이 안과에서 받아온 시력측정 결과를 보더니 흠짓 놀라네요. 첫 안경이냐면서요. 보통 0.5~0.6 정도에 찾아오는데 저희애는 첫 안경이 0.1이고, 안경을 씌워도 0.6을 정확히 읽지 못했거든요.

그런데도 해맑게 웃으며 괜찮다고 하니 더 미치겠어요. 부모 안심시키려고 그러는 것인지,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 저러는 것인지 감이 안잡혀서요. 아마 두가지 다 섞였겠지요.

결국 안경테는 어린이 전용 브랜드에서 고르고 렌즈도 청색광까지 차단된다는 UV코팅 렌즈로 끼워줬어요. 처음 생각했던 예산을 넘어갔고, 어차피 첫 안경이라 금방 부러질 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이에게 더 미안해질 것 같아서요.

안경을 씌워주고 잘 보이냐고 물어보니 짱 잘보인다며 좋아하네요. 이제 아빠 얼굴 잘보이냐고 물어보니 (안경을 아래로 내리며) 이렇게 하면 안 보이는데 (안경을 다시 쓰며) 이렇게 하면 짱 잘보여요라고 이야기하고요. 웃으며 해맑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어찌나 가슴 아프던지요. 어쩌면 오늘이 아빠 얼굴을 또렷히 본 첫 날일지도 몰라서요.

그래서 아이에게 안경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며 안경은 제2의 눈이다, 안경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 앞으로는 뛰지 말고 걸어야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자 눈치없이 큰 애가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그럼 앞으로 축구도 못하고 피구도 못하는거에요?

그 소리에 작은애가 화들짝 놀라더군요. 그래서 그런거 아니라며 조심해서 하면 된다고 이야기 했는데 아무래도 실망한 눈치에요. 8살 남자아이에게는 잘 안보이는 것보다 뛰지못하는게 더 큰 실망이겠지요.

그나저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제 밖이 잘 보이니?라고 물었더니 아빠, 이제 글씨가 보여요. 예전에는 글씨가 안보였는데 이제 볼 수 있어요 라네요. 그동안 길가의 간판 글씨가 안 보였던거에요. 안경을 써도 고작 0.5 밖에 안 나오는데 그게 잘 보인다고 좋아하니 정말 환장하겠더군요. 주책맞게 눈물은 왜 또 나오는지...

집에 와서는 큰 아이를 방으로 데리고가 동생 앞에서 말조심하라고 주의를 줬어요. 하나 뿐인 동생이니 잘 돌봐주라면서요. 자기도 말 실수한게 미안했는지 울더라고요. 동생이 불쌍하다고요. 학교에서도 동생 놀리는 애가 있으면 자기가 혼내주겠데요. 그래서 둘이 끌어안고 같이 울었네요.

요즘 제 마음이 많이 약해졌나 봅니다. 툭하면 눈물이 나요. 이 글을 쓰면서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 동안 이 아이는 어떤 세상을 보며 살아왔을까 싶어서요.

이미 안과에서 1시간짜리 검진까지 받은 상태라 큰 기대는 안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서울대 병원과 스홀맘께서 알려주신 안경원을 예약했어요. 근시가 좋아지기는 어렵겠지만 교정시력이라도 올려보고 싶어서요.

혹시 스홀 가족 중 아이 눈과 관련해서 도움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신가요?

작은 조언이나 경험이라도 좋습니다. 뭐라도 도움될게 있다면 함께 나눠주세요. 상담이 됐든 무엇이 됐든 저도 도울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 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아이를 방치했던 무지한 아빠가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추신 1. ‘공부는 못해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었는데 그 말이 정말 간절해집니다. 제 눈이라도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추신 2. 아이에게 많은 곳을 보여주고 싶어 강연이 있을 때 여행삼아 아이들을 데려간 적이 있어요. 그러면서 나름대로 좋은 아빠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제까지 허투로 보여줬네요. 눈내린 설악산, 우람한 울산바위, 제주도의 드넓은 바다와 다양한 공연 등 아이에게 여러가지를 보여주며 저것 봐, 엄청 멋있지?라고 이야기했는데 아이는 그럴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온통 뿌옇게 보일 뿐인데 어째서 멋있다고 이야기했던 것일까요? 이제까지 아이에게 보여줬던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냥 소리만 듣고 재밌다고 했던 것일까요? 아이가 어째서 재밌다고 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그걸 눈치채지 못한 제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납니다. 책상에 머리를 몇 번이나 들이받았어요. 아이와 함께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눈물만 나와서요. 저한테만 아름다운 추억이었네요.

추신 3.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시력을 올려준다는 한의원들이 여럿 있어요. 침이나 한약으로 고친다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아요. 그래도 시력만 올릴 수 있다면 꼭 치료받게 하고 싶은데 후기가 별로 없네요. 혹시 스홀맘들 중에 한방치료를 통해 시력을 교정하신 분 계신가요? 예전같으면 사기라며 웃고 넘어갈텐데 제 아이의 일이 되니 마음이 흔들리네요. 이럴 때일수록 강해져야 할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