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교사] 자유게시판 (자녀와 ID 공유 금지)

올해부터 경기도에서는 고등학생들의 야간자율학습이 폐지됩니다. 이에 따라 야자의 효용성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고 있네요. 야자를 폐지하려면 전국적으로 다 같이 폐지를 해야지 우리 지역만 폐지하는 것은 우리 지역 아이들의 경쟁력만 낮추는 불공평한 정책이기 때문에 야자를 없애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고, 어차피 야자시간에 떠들고 자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효용성이 떨어졌으니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만 알아서 공부할 수 있게 야자를 폐지해주는 것이 맞지 않냐는 주장도 있는 등 의견이 분분한 것이지요.

사실 상위권 학생들의 경우 모든 학생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현재방식의 야자는 독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상위권 학생들은 강제로 붙잡아 놓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를 하기 때문에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최대한 많이 주는 것이 좋지요. 야자를 시키지 않더라도 집에서든 독서실에서든 학원에서든 어디서든 공부를 할 테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상위권 학생들이나 부모님들은 야자 폐지를 환영하는 분위기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위권이나 하위권 학생들에게서 발생합니다. 중위권 이하의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야자를 통해 강제로라도 공부를 시키지 않으면 최소한의 학습량도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올해부터 야자가 폐지되면 중위권 이하의 학생들은 학습량이 줄어듦에 따라 학력도 낮아질 가능성이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학교의 전반적인 학력 및 학업 분위기도 현재보다 더 낮아지겠지요. 학교 입장에서도 학생들의 학력이 낮아졌다 보니 수업 수준도 그에 맞춰 함께 낮춰야 되서 결국 상위권 학생들은 지금보다 더 무의미한 수업을 듣게 되어 버릴 수도 있고요. 교내 대회나 동아리 활동 등 각종 비교과 활동들도 마찬가지고요.

즉, 그동안 야자가 논란이 되었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한 교실에 모든 학생들을 모아놓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다 보니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서 학습효과가 크지 않았던 것인데 이럴 거면 아예 없애버리자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성적에 따라 분반을 하거나 야자 감독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체적인 학력을 끌어올려서 학교 분위기를 쇄신해야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지금도 일반고와 특목고, 교육열이 높은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의 학교 분위기가 하늘과 땅 차이를 보이는데 앞으로 야자가 폐지되면 그 격차가 더 심해질 것으로 예상되거든요.
(사실 이 정책은 특목고나 분당, 평촌, 일산 등 교육열이 높은 지역 부모님 그리고 경기도 이외의 지역 분들에게는 상당히 기뻐할 만한 정책입니다. 우리 아이의 실력을 더 끌어올리지 못하더라도 경쟁자들의 실력이 낮아지니 우리 아이들의 대입은 더 수월해지겠지요.)

하지만 소위 교육특구 지역 부모님들도 안심하실 수는 없는 것이 경기도에서 앞으로 야자시간에 예비대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경기도교육청에서는 야자 폐지만 들고 나왔으나 야자가 폐지될 경우 아이들이 학원으로 몰려서 사교육비가 증가될 수 있다는 비난여론이 발생했기 때문이지요.

예비대학 프로그램은 자유학기제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아이들이 대학을 미리 경험해 보며 자신의 진로를 정확히 선택함으로써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에 진학했다가 전과나 편입을 하는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교육적으로만 봤을 때는 굉장히 이상적인 좋은 발상이지만 제로섬 게임이라는 대입 체제를 간과한 비현실적인 정책이라고 생각되거든요. 적성을 찾아서 올바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문제는 성적이 안 되면 대학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게대가 예비대학이라는 것이 충분한 준비와 테스트를 거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 조장이냐 라는 비난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급조해낸 정책에 불과해 보여서 자칫하면 우리 아이들이 마루타가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되거든요.

(중학교에서는 자유학기제가 지역별 학력격차를 심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는데, 고등학교에서는 야자 폐지가 지역별 학력격차를 심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꿈과 끼를 키워야 할 소중한 우리 아이들에게 공부만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제로 야간자율학습을 시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지요.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충분한 대안없이 경기도에서만 야자를 폐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정책일까라는 의문이 드네요. 최악의 경우 경기도 학생들은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내다 지옥같은 대입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추신 1. 예비대학이라고 하니까 기존에 이뤄지던 명문대 탐방이나 명문대 학생들의 멘토링, 고교-대학연계과정 같은 것이 아닐까라고 오해하실 분들도 계실 텐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예비대학은 대학을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주는 프로그램이 아니거든요.

대학 입장에서는 자기 대학 홍보도 되고 수익도 생기는 1석 2조다 보니 경기도의 예비대학을 환영하는 눈치 같은데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정규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해 본 경험이 거의 없다 보니 기존에 있던 교양강좌들을 재탕하는 식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몇몇 대학들이 예비대학에 참여할 강사들을 급하게 모집하고 있더라고요. 즉, 기존에 있던 대학 교수들이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겠지만 대부분 외부시간강사나 대학원생들을 모집해서 운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연 내실있는 수업이 될 수 있을지...

참고로 경기도 교육청이 권장하는 예비대학 프로그램 강좌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 영국에 영어는 없었다. 영어와 프랑스어의 언어전쟁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로 사회와 철학 읽기

▲ 생활로 풀어보는 건축물 원리 이해

▲ 복지 선진국의 사례를 통해 만드는 대한민국 미래 시대의 복지제도

▲ 청소년의 창의력 향상을 위한 공간 디자인

▲ 음식으로 살펴보는 동아시아 역사와 문화

추신 2. 같은 성향의 교육감들끼리는 정책을 공유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같은 진보계열 교육감 산하 지역으로 야자 폐지 및 예비대학 프로그램이 확산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경우 교육감의 성향에 따라서 지역별 학력격차 및 대입실적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겠네요. 이미 지금도 그런 현상이 보이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