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을 서재로 만들어 놓고 간식으로 아스파라거스를 깔아 육즙 풍부한 소고기로 올려 줘도 아이는 나가서 돌아 오지 않는다. 외출 시간 삼가고, 하교 시간, 학원 다녀 오는 시간 맞춰 밥해먹이고 그 좋아하는 드라마도 본방 사수를 포기하며 애써 폰으로 몰래 보곤 했는데 아이와는 점점 더 소원해 지고 키워준 보답으로 가져 와야 하는 성적표는 더욱 더 빈약해 진다.

얼마나 타인을 비난 했던가.

"엄마, 엄마" 참새처럼 조잘 거리며 신동같이 굴었던 내 새끼가 붉은 틴트의 짧은 치마 무리에 속할지는 생각도 못했고 부모 또한 게임과 학원 스케줄을 CIA 수준으로 확인해야 하게 될지는 생각도 못했다. 옆으로 넘기는 문제집, 앞뒤로 넘기는 문제집 한두권으로 100점 초등을 두었던 그 때 서울대 정원은 우리집 뒤뜰 수준이었다.

초등 고학년부터 짜증이 는다 싶어 옆집에 앞집 상담을 해보면 아직 때가 안되었으니 더 기다려야 한다고, 뒷 목 잡고 하염없이 창문 바라보는 중등 시기가 올 것이라고 말한다. 투자한만큼 나오지도 않는 아이, 조언대로 하면 다 될 것 같은데 안되는 아이, 인터넷과 이비에스, 학원 전단지 등 엄친아들을 도처에 널린 것 같은데 왜 내 아이만 마음대로 안되는지 모르겠다.

가까스로 사춘기를 넘겼거나, 나름대로 가능성이 있어 보여 특목도 생각해 보았는데 고등 공부가 진짜 시작이다. 높은 난도, 많은 양, 벅찬 과목에 중등까지 목에 힘을 주게 했던 내 아이가 맥없이 쓰러지고 만다. 학원도 바꿔 보고, 별의 별 비법을 다 전수 받아보지만 내 아이만 비껴 간다. 절벽에 피어있는 한송이 꽃같은 우등생 공책을 가까스로 따왔는데 공책을 펴는 순간 알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우리 아이에겐 안 맞는 옷이었구나...

내가 어떻게 길렀는데, 내가 어떻게 투자했는데...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으면 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은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교육으로 무장했으니 잘될것이라 믿는 믿음처럼 허망한 게 없다.

전반적인 개념 철학과 생활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되면 사교육이냐, 아니냐, 어떤 대학을 갈것이냐에 목메이지도 않는다. 개인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우선 순위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세부 내용이 바뀌게 된다.

어렵고 힘든게 당연하다. 어떤 개인도 그를 둘러싼 사회, 문화적 배경을 등지고 우선 순위를 세상과 반대로 정하는 것이 마음 편치는 않을 것이다. 그 또한 내가 정한다고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소신과 원칙이 자녀의 미래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혹은 소신과 원칙이라는 말로 자기 합리화 시키는 것은 아닐까, 내 문제로 보면 간단해도 자식이 어른거리면 소심해 진다.

그래서 허벅지 찔러가며 “내 삶의 원칙이니까 지켜 나가야 해!”라고 구호를 외치는게 중요하지 않다. 정치 효능감처럼 내 원칙을 지켜 나가니 나에게 돌아오는 만족감도 있더라의 순환 체계가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원칙도 소신도 굳건해진다. 부모 자녀 사이에 만족할만한 순환체계가 성적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 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삶을 따라가다 보면 바라지 않았는데 바라는 것이 따라오게 된다. 얼굴 때깔도 고운데 원하는 것도 적당히 가질 수 있게 된다. 재수없지만 부럽기도 한 상황이 된다.

내 삶의 우선 순위는 이야기가 있는 저녁과 주말 오후였다. 함께 산책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어떤 주제에 관심 있어 하는지, 어떤 부분을 고민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관심있게 지켜 보고 잊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이야기를 통해 구현되었다. 아이 이야기만 들은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도 했다.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더 잘낫고 가르침 받는 수준이 더 못난 것이 아니라 동등하게, 공생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구성원으로서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한없이 내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지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아이를 끌어주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관심있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관찰할 수 있었다.내가 부족하니 남에게 손쉽게 맡기자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이 좋은 방법은 알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 아이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검색창에 아이의 관심어를 치고 난뒤 그 관심어의 책을 고르고 목차를 살폈다. 권장 도서 목록보다 아이의 관심어가 먼저였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런식으로 아이에게 권해 주었고, 가능한 반대쪽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책을 구입하여 양쪽으로 볼 수 있게 하였다. 예를 들면 어렸을 때는 -심청이 vs 심청이는 효녀였을까? 청소년이 되어서는 제국의 위안부 vs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는 열가지 판결- 이런식으로 말이다.

사교육의 문제는 여기서 고민이 되었다. 이런식의 책읽기는 많은 시간을 요했고, 함께 저녁을 먹거나 산책하며 이야기 하는 과정 또한 포기할 수 없는 순환체계의 보상이었다. 그래서 과감히 사교육을 포기했다. 멋 훗날의 일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 충실한 기쁨을 얻고 나도 아이도 서로의 성장을 바라볼 수 있는 소소한 결과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아무 대책없이 자기 주도가 좋다고 하니 사교육을 하고 말고를 결정한 게 아니다.

나는 아직도 아이와 대화를 나눌 때, 가장 행복하다.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고, 새로운 개념을 습득하며, 별 것 아닌 문장인데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비밀 정서를 공유하게 될 때, 그 이상의 기쁨이 없다. 성적도 묻지 않고, 목표를 묻지도 않았다. 기쁨이 있으면 스스로 꺼낼 것이고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되는 여러 간접 경험에 의해 목표는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 말은 줄이고, 더 많이 들었다. 여러번의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겠지만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험난한 수용소에서도 인간의 선택은 여러 개로 나뉜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라 말하며 환경에 휘말리는 이들도 있고 누가 보지 않아도 매일 면도하며 제 시간에 일어나는 이들도 있다. 죽어 가는 사람의 빵을 빼앗아 내 호주머니에 넣는 이도 있고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내 물을 나눠 주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대상이 내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해도 어떤 것을, 그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오직 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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